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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상의 미술, 신앙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순교자의 시선

by overtheone 2025. 6. 29.

 

정하상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대를 살다간 신앙인이자 순교자이며, 동시에 종교적 미술과 예술적 감수성을 함께 간직했던 인물이다. 그의 삶과 신앙, 문화적 감각은 단순한 교리 실천을 넘어, 예술적 실천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정하상의 생애, 종교와 미술의 관계, 그리고 한국 종교미술의 기반으로서 그의 상징성과 예술사적 함의를 고찰한다.

정하상 관련 사진

순교자 정하상, 신앙과 사상의 교차점에서

정하상(丁夏祥, 1795~1839)은 조선 후기의 천주교 순교자로,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된다. 그는 한국 천주교의 자생적 성장기를 이끌었던 지도자이자, 신앙과 지성, 문화적 감각을 모두 갖춘 전인적인 인물이었다. 정하상의 삶은 종교의 박해 속에서도 신념을 지키며 자신의 사상과 믿음을 관철시킨 기록이며, 동시에 미술과 예술, 문화의 향기를 함께 간직한 정신적 유산이기도 하다. 정하상은 양반가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삶은 ‘신앙’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 전체가 천주교에 귀의했던 환경 속에서 자랐고, 부친 정약종과 형 정약전, 정약용 등의 영향을 받아 실학적 사고와 천주교적 가치관을 동시에 체화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단지 신앙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조선의 보편적 윤리체계와 충돌하는 서양 사상과 종교 철학을 체계적으로 번역·서술하고 정리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저술인 《상재상서(上宰相書)》는 종교와 국가, 윤리와 충절, 신앙과 양심 사이의 갈등을 뛰어난 논리로 해석하며 한국 종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정하상의 삶은 예술가의 삶은 아니었지만, 그의 정신과 신앙은 이후 천주교 회화와 종교미술에 강한 영향을 미친 상징적 토양이 되었다. 그는 교회 미술의 수요자가 아니라, 교회미술의 정신적 아버지였으며, 그의 순교는 단순한 죽음을 넘어 한국 종교예술의 깊이와 무게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가 살았던 시대, 조선 후기의 미술은 대부분 유교적 질서와 사대부 문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종교적 미술은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그런 가운데, 정하상은 신앙과 정신, 인문학과 미학의 융합을 실현할 수 있었던 드문 지성인이었고, 그는 존재만으로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인물이었다. 그의 인격과 신앙, 지식과 용기는 후대 종교화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이후 성화(聖畵)와 순교자 초상, 성서적 도상 등의 한국적 해석에도 간접적인 기반이 되었다. 정하상은 자신이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화가들의 마음에 ‘형상’으로 각인된 최초의 종교 예술적 모티프였다.

정하상과 한국 종교미술의 상징적 뿌리

조선 후기의 회화사에서 천주교적 도상이 직접 등장하기는 어려웠지만, 정하상 이후 한국 종교미술의 조형적 기반은 분명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는 종교미술이 단순한 시각적 장치가 아니라, 신앙의 체현이자 신념의 전달 매체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정하상의 신앙과 사상은 이후 종교 미술에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예로, 19세기 말~20세기 초 성화 작가들의 초기 작품에서는 정하상의 형상을 도상화하거나, 그가 남긴 글과 순교의 장면을 신비적 상징으로 표현하는 시도가 등장한다. 그는 전통적인 동양 인물화의 구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면성’을 드러낸 도상으로 각인되며, 이후 종교 인물화에서 ‘성자의 얼굴’이라는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데 기여한 인물로 간주된다. 특히, 한국 성화(聖畵)는 서구의 고전 회화 기법을 수용하면서도, 정하상과 같은 인물을 동양적 필치와 정서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예컨대, 검박한 선묘와 여백, 수묵 담채의 조화 속에 강한 시선을 드러내는 정하상의 초상은 단순한 인물화가 아니라 영적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조형언어로 작용한다. 그의 순교 장면을 다룬 작품들에서도 종종 붉은 색채가 상징적으로 사용되며, 이는 피와 희생, 신앙의 열정을 함축하는 색으로 기능한다. 또한 그의 형상은 세속적 화려함과 거리를 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며, 이 역시 ‘세속에 속하지 않은 존재’라는 종교적 상징성과 연결된다. 정하상은 직접적인 화가가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는 한국 종교미술의 원형으로 기능했으며, 그의 사상과 신념은 형상 너머의 감정과 정신으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그는 회화가 종교의 가르침을 시각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실질적으로 입증한 인물이며, 이후 수많은 성화 화가들에게 철학적·신학적 사유의 원천이 되었다. 결국 정하상은 종교미술의 탄생을 이끈 예술적 촉매제였고, 한국 회화사 속 ‘보이지 않는 예술가’로 자리매김한 인물이었다.

형상을 넘어선 신앙, 정하상이 남긴 예술의 뿌리

정하상은 붓을 들지 않았지만, 그의 삶은 예술 그 자체였다. 그는 고난 속에서도 신념을 꺾지 않았고, 글로, 사유로, 침묵으로 신앙을 표현했다. 이러한 그의 존재는 이후 종교미술가들에게 회화의 형식 너머를 고민하게 했으며, 신앙이 어떻게 예술로 전이될 수 있는지를 체감하게 했다. 오늘날 그의 형상은 다양한 성화 속에 재현되고 있으며, 그 얼굴은 고통과 평온, 희생과 승화를 동시에 담아내는 시각적 언어로 자리하고 있다. 그의 순교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예술의 정신을 다시 묻는 계기이기도 하다. 정하상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림처럼 살아라’고 답한 사람이다. 그의 삶은 도상 이전의 도상이며, 그 정신은 형상 이전의 형상이다. 한국 종교미술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오늘날에도 성화 속에서 조용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정하상은 예술가가 아니었지만, 그 누구보다 예술가다운 생을 살았다. 그의 존재는 한국 종교미술의 최초의 붓놀림이자, 형상이 될 수 없는 진실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