쟝 르옹 제롬은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아카데미즘 화가로, 동양주의를 회화에 정교하게 구현하며 유럽인의 시선 속 타자화된 ‘동양’을 표현했다. 본문에서는 제롬의 생애, 작품 분석, 그리고 그의 회화에 담긴 제국주의적 시선과 예술사적 맥락을 살펴본다.
화려한 이국의 풍경, 시선의 권력
쟝 르옹 제롬(Jean-Léon Gérôme, 1824–1904)은 19세기 중후반 프랑스 아카데미즘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로서, 역사화와 신화, 종교 주제뿐만 아니라 ‘동양주의(Orientalism)’ 장르에서 특히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는 철저한 고증과 탁월한 묘사력으로 동양의 풍경과 인물, 문화적 장면들을 사실적으로 구현해냈지만, 동시에 이러한 이미지는 유럽 중심적 관점에서 구성된 ‘타자의 이미지’라는 비판도 함께 받는다. 제롬은 1850년대 중반부터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여행하며 다양한 시각 자료를 수집했고, 이를 토대로 수많은 동양주의 회화를 제작하였다. 그의 대표작들에는 **<뱀 연기꾼(The Snake Charmer)>**, **<하렘의 목욕>**, **<카이로의 시장>** 등 이국적이면서도 연출된 ‘동양의 환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제롬은 실제 경험과 회화적 상상력을 결합하여, 유럽 관객에게 낯선 문화를 관음적이고 시각적으로 소비할 수 있도록 재현했다. 서론에서는 쟝 르옹 제롬의 시대적 배경과 작가로서의 경력, 동양주의 회화에 접근하게 된 계기와 철학을 조망한다. 동양주의는 단순한 이국적 묘사가 아닌, 정치적·문화적 맥락에서 형성된 시각적 권력의 구조이며, 제롬은 그 구조 속 중심에서 동시대 유럽의 욕망과 환상을 화폭에 정제된 형태로 담아낸 작가였다.
동양의 재현인가, 연출된 환상인가
쟝 르옹 제롬의 동양주의 회화는 뛰어난 묘사력과 세밀한 사실주의로 찬사를 받는 동시에,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의 권력적 시선을 반영한 대표적 사례로 비판받는다. 그의 작품은 사진처럼 정교하게 묘사되었으며, 인물의 의상, 건축의 디테일, 질감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성은 때로는 동양의 ‘진실’이라기보다, 유럽인의 시각에 맞춰 편집된 시각적 시나리오였다. 예를 들어 **<뱀 연기꾼>**은 밝은 모자이크 벽 앞에서 반나체 소년이 뱀을 다루는 장면으로, 동양적 이국성과 관음성을 극대화한 구성을 띤다. 이 장면은 실제 장소의 재현이라기보다, 유럽인이 상상하던 ‘미지의 동양’을 완성도 높은 연출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제롬의 작품은 현실의 기록이 아닌 이상화된 서사를 전하며, ‘동양은 정적이며 낙후되었고 유럽은 진보적이며 합리적이다’라는 당시 지배 담론을 시각화했다. 그의 하렘 묘사 작품 역시 유럽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이슬람 여성의 공간을 과장되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제시했다. 이는 시각적 유희를 제공하는 동시에 동양의 폐쇄성과 성적 대상화를 동시에 암시한다. 유럽 회화 전통에서 여성 누드는 고전적 규범에 기초했지만, 제롬의 하렘 여성은 명백히 정치적·문화적 타자화의 결과물이었다. 제롬은 단지 ‘보는 이’가 아니라 ‘보게 하는 이’였다. 그는 유럽 관객이 바라보길 원하는 방향으로 동양을 연출하였고, 이는 회화라는 예술이 권력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교사로서도 영향력이 컸으며, 미국 및 유럽 화단에 수많은 제자를 배출해 동양주의 회화의 세계적 확산에도 기여했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단순한 미술사의 장르를 넘어, 근대 시각문화와 제국주의 담론의 핵심 텍스트로 분석된다. 이러한 분석은 단순히 제롬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회화를 통해 어떤 시각 체계를 구축했는지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그의 기술적 완성도와 시각적 매력은 분명 탁월했으나, 그것이 형성된 맥락과 그 안의 권력 구조 또한 반드시 함께 읽혀야 한다.
예술인가, 권력의 풍경인가
쟝 르옹 제롬의 동양주의 회화는 한편으로는 회화사에서 탁월한 사실주의의 구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시대 유럽의 욕망과 권력의 시선을 고스란히 담아낸 시각적 텍스트로 해석된다. 그는 높은 완성도의 회화로 ‘이국적인 세계’를 관객에게 제공했지만, 그 이면에는 문화적 편견과 시선의 위계가 구조화되어 있다. 그의 그림을 보는 오늘날의 관람자는 단순한 감탄을 넘어서, 예술의 배후에 자리한 역사적 맥락과 권력 구조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술은 시대의 반영이며, 제롬의 회화는 19세기 유럽이 ‘동양’을 어떻게 바라보고자 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여전히 현대의 포스트콜로니얼 담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제롬은 의도했든 아니든, 회화를 통해 제국주의적 시선을 시각화했고, 그것이 예술로 승화되었든 연출된 환상이었든 간에, 그는 예술과 권력의 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증명한 인물 중 하나다. 결국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예술은 언제나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시선은 언제나 권력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