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는 서예와 추상이라는 상반된 장르를 융합하여 문자추상이라는 독창적 화풍을 개척한 예술가다. 그는 동양의 전통성과 서양의 현대미학을 조화시키며, 한국 미술이 세계미술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했다. 본문에서는 이응노의 문자추상이 지닌 조형미, 철학, 그리고 동양미술사적 의의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한다.
서예에서 추상으로, 경계를 허문 이응노의 도전
이응노(1904~1989)는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가장 실험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인 궤적을 남긴 예술가로 손꼽힌다. 그의 예술은 단순히 장르를 넘나드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그 장르 간의 간극을 창조적으로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미술 언어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문자추상’이라 불리는 그의 대표 화풍은 서예와 추상의 융합이라는 점에서, 동서양 미술의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시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응노는 일찍이 전통 서예에 정통했으며, 조선 서화의 고전적 원리를 몸으로 익힌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해방 이후 급변하는 사회 현실과 국제 미술의 흐름을 마주하며 그는 ‘글자란 단순한 의미의 전달을 넘어서 시각 예술의 구성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사유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문자추상이다. 문자추상은 말 그대로 ‘문자’를 회화의 주된 형식 요소로 사용하면서도, 그 문자 자체가 전달하는 의미는 의도적으로 해체하고 시각적 조형성에 집중하는 작업이다. 이응노는 한자, 한글, 기호, 고문자 등의 형상을 자유롭게 재구성하며 화면 전체에 리듬과 구조를 부여했다. 이는 서예의 조형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추상회화가 지닌 자유로운 표현 가능성을 끌어들인 혁신적인 회화실험이었다. 그가 문자추상에 몰입하게 된 시기는 1950년대 후반부터였으며, 이후 파리로 건너간 뒤 본격적인 국제 활동을 통해 그 예술 세계는 더욱 확장된다. 파리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에 참가하면서 그는 ‘동양적 정체성을 지닌 현대미술가’로서 유럽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문자추상은 이응노 개인의 실험에 그치지 않고, 동양미술의 현대적 변용 가능성을 제시한 매우 상징적인 미술적 언어가 되었다.
문자와 조형, 이응노 예술의 구조와 미학
이응노의 문자추상은 전통 서예의 필획과 구조, 그리고 추상미술의 공간 구성과 감각을 절묘하게 혼합한다. 그는 단순히 문자의 형태를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의 움직임과 흐름, 그리고 화면 내에서의 리듬을 통해 감각적 조형성을 극대화했다. 이는 단순한 문자 장식이 아니라, 회화 자체를 구성하는 원리로서 기능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문자추상 No.7》(1964)은 반복되는 문자 형상들이 화면 전체를 메우면서도, 각기 다른 방향성과 강약, 크기를 통해 하나의 음악적 리듬을 형성한다. 서예에서 볼 수 있는 먹의 번짐, 속도, 압력은 그대로 유지되며, 그것이 추상적 구성 안에서 조형 언어로 변환된다. 이는 동양적 수행성과 서양의 조형미학이 결합된, 매우 독창적인 회화적 결과물이다. 또한 이응노는 ‘문자’라는 형상이 가진 의미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해석을 유도했다. 문자추상 속의 글자는 의미 전달의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가 사라졌을 때 오롯이 남는 ‘형태’와 ‘감정’이 작품의 중심이 된다. 이 과정에서 관람자는 각자의 경험과 감각에 따라 그림을 ‘읽게’ 된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개방된 의미망을 지향하는 탈구조적 미학을 내포하고 있다. 이응노의 작업은 단순히 시각적 실험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작품에는 동양적 사유, 특히 불교와 선(禪)의 철학이 깊이 스며 있다. 반복과 리듬, 비움과 채움, 운동과 정지의 교차는 모두 불교적 수행과 일상의 감각을 은유하는 요소다. 그는 문자 하나하나를 쓰는 행위를 단순한 조형이 아닌 ‘예술적 명상’으로 실천했고, 이는 문자추상이 단순한 기법이 아닌 하나의 세계관임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문자추상은 한국미술이 서구 중심의 미술사 내에서 독립적 목소리를 가질 수 있게 해준 전략적 도구이기도 했다. 이응노는 한국의 전통성과 현대적 표현 양식을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문자추상은 한국미술이 서양미술의 영향을 넘어 고유한 정체성을 획득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이응노의 문자추상, 동양미술의 재창조
이응노의 문자추상은 단순한 양식의 실험을 넘어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형식과 사유 사이의 경계를 허문 예술적 혁신이었다. 그는 서예라는 동양의 고유 형식을 현대미술이라는 보편적 언어로 재해석함으로써, 동양미술의 독창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실현해냈다. 그의 작업은 단지 한국화의 변형이 아니라, ‘동양적 미학이 현대적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강력한 답변이었다. 서예라는 정체성은 문자추상을 통해 추상의 영역으로 확장되었고, 그것은 세계 미술 속에서 한국미술이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응노의 예술은 단지 시각적 결과물이 아니라 삶의 태도이자 실천이었다. 그는 예술을 통해 끊임없이 시대를 성찰하고, 예술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으며, 그 과정에서 창작은 곧 수행이 되었고, 작품은 곧 철학이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술가로서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며, 문자추상은 그 사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응노는 문자추상을 통해 동양미술을 다시 썼고,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그의 예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전통과 현대, 지역과 세계를 잇는 다리로 기능하고 있다. 이응노의 문자추상은 단지 하나의 화풍이 아니라, 동양예술이 어떻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