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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의 채색화, 한국 근대화단에 흐른 서정과 전통

by overtheone 2025. 6. 16.

이상범은 조선화단의 마지막 문인화적 정서를 이어받으면서도, 채색화를 통해 한국적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인물이다. 전통 회화의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서정성과 감각적 표현을 강조한 그의 작업은, 근대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한다. 본문에서는 이상범의 채색화가 지닌 미학적 특징과 근대화단에서의 위상, 그리고 후대에 끼친 영향 등을 살펴본다.

이상범 관련 사진

격동기의 화단에서 피어난 한국적 서정

한국 근대미술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20세기 전반, 서구 미술의 유입과 일본식 미술교육의 확산 속에서 한국 전통 회화의 정체성은 위기를 맞았다. 이 시기 수묵화는 점차 영향력을 잃어갔고, 서양화가 중심이 된 화단에서는 회화의 근대화란 곧 유화의 도입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전통 회화의 언어를 기반으로 하여 현대성과 감각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상범(1897~1972)이다. 이상범은 한국화단에서 채색화의 정수를 구현한 화가로, 그의 작품은 전통 문인화에서 유래한 조형 원리를 기반으로 하되, 색채와 구성에서 탁월한 현대적 감각을 발휘하였다. 그는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시립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동양화와 일본화의 기법을 익혔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고유한 화풍을 형성하였다. 특히 그가 추구한 채색화는 과도한 장식성을 배제하면서도 감성적 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이상범은 단지 기법의 혁신가가 아니라, 회화가 감정을 담는 그릇이라는 인식을 지닌 예술가였다. 그의 그림 속 자연은 단지 시각적 대상을 넘어서 인간의 감정과 정신적 울림을 반영하는 상징으로 기능하였다. 그래서 그의 산수는 실경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이상적이고, 그의 꽃과 동물은 생태를 그린 것이 아니라 정서를 드러내는 장치였다. 그는 말년에 이르기까지도 “그림은 곧 나의 마음이다”라고 했으며, 이는 그의 채색화가 단지 기술을 넘어선 ‘마음의 회화’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예술은 전통과 현대, 감성과 기법 사이에서 매우 정제된 조율을 이뤄냈다. 수묵 위주의 전통 문인화가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이상범은 채색이라는 매체를 통해 조선적 미감의 연속성을 확보했으며, 동시에 변화된 감각을 회화에 녹여냈다. 이로써 그는 근대화단 속에서도 유행과 다른 결을 가진 고유의 예술세계를 구축하였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다.

이상범 채색화의 특징과 근대 회화사적 의미

이상범의 채색화는 풍경, 화조, 인물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면서도 일관된 정서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특히 그는 자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으로 전환시켰고, 이는 그의 채색기법과 구도 방식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표작으로는 《설경》, 《추경산수》, 《노송과 학》 등이 있으며, 이들 작품은 조형적 완성도와 정서적 울림을 동시에 지닌 한국 채색화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설경》은 이상범 회화의 정수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은은한 흰색과 회청색의 조화를 통해 눈 덮인 산천의 정적과 고요를 표현하였으며, 화면 구석에 작은 인물이나 건축물을 배치하여 인간 존재의 겸허함을 강조한다. 색채의 사용은 절제되어 있으나, 오히려 그 제한된 색 안에서 깊은 정서적 밀도가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기법은 단순한 ‘색의 나열’이 아니라, 감정의 농담을 조절하는 미학적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추경산수》에서는 가을 산의 따뜻한 기운과 쓸쓸한 분위기가 조화롭게 공존한다. 붉은 단풍과 갈색의 땅, 흐릿한 하늘과 정자 등이 조밀하게 배치되어, 계절의 정취뿐 아니라 인간의 정서를 투영하는 화면을 구성한다. 특히 이상범은 계절의 색을 단지 묘사적 차원이 아닌, 심리적 상징으로 활용함으로써 회화에 내러티브를 부여했다. 이러한 구성은 당시 화단에서 드물게 시도된 회화적 감수성의 확장이었다. 《노송과 학》과 같은 화조화에서는 동양화 전통의 상징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형식에서는 훨씬 자유롭고 감각적인 표현을 보인다. 노송은 불굴의 정신과 장수를, 학은 고결함과 평화를 의미하지만, 이상범은 이 상징들을 회화적 장식이 아닌, 화면 내 심상으로 배치하였다. 덕분에 그의 화조화는 설명보다 감정이 앞서는 회화로 재해석될 수 있었고, 이는 한국 채색화가 단순한 상징화에서 벗어나 회화성 그 자체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상범의 채색화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정적이지만 생동하는 화면’ 구성이다. 그는 화려한 색을 지양하고 은은한 색감 속에 운동감을 심었다. 이는 조선 전통의 선비 정신을 담으면서도, 근대의 감각을 섬세하게 반영한 결과물이다. 이상범은 단순히 채색을 잘한 화가가 아니라, ‘색을 통한 사유’를 실현한 예술가였다.

전통과 현대를 잇는 이상범의 예술정신

이상범은 채색화라는 매체를 통해 조선화의 마지막 정서를 계승하고,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회화의 언어를 창조한 예술가였다. 그의 회화는 기술적 정교함을 넘어서, 사유와 감정, 자연과 인간, 전통과 현대를 한 화면 안에 아우르는 복합적 예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그림은 마음’이라 믿었고, 그 마음은 그림을 통해 사람들과 교감하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일제강점기라는 문화적 억압 속에서 한국미술이 정체성과 생존을 동시에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상범은 전통을 지키되 시대의 감각을 배제하지 않았고, 채색이라는 언어를 통해 고유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구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점은 그가 단지 과거를 고수한 화가가 아닌, 시대를 이해하고 대응한 예술가였음을 입증한다. 또한 이상범의 화풍은 현대 한국화 작가들에게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절제된 감정’과 ‘은은한 표현’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매력적으로 작용하며, 새로운 회화적 문법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이는 이상범 예술이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잇는 살아 있는 전통임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이상범은 한국 채색화의 미학을 완성한 예술가이자, 조선적 정서를 근대회화로 옮겨낸 가교의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의 작품은 감상자에게 단지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음속 정적을 불러일으키며 진정한 의미의 ‘예술적 경험’을 선사한다. 그가 남긴 채색화는 지금도 여전히,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그 아름다움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