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은 20세기 한국 단색화 운동의 중심에 선 작가로, 짙은 남색과 갈색의 수직 색면을 통해 존재, 고통, 사유를 담아낸 화가다. 그의 작품은 침묵을 담은 회화, 혹은 존재론적 사유의 기록으로 불리며, 한국 추상미술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본문에서는 윤형근의 색면추상과 그 안에 담긴 철학적 깊이를 조명한다.
고요한 저항, 윤형근의 예술적 출발
윤형근(1928~2007)은 한국 단색화의 흐름 속에서 가장 묵직한 울림을 지닌 작가였다. 그는 화려한 기교나 복잡한 구조를 배제하고, 철저한 절제 속에서 색과 형태의 본질을 탐구했다. 그의 회화는 강렬한 감정을 표출하지 않지만, 화면에 드러난 침묵은 오히려 더 큰 존재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그는 젊은 시절 한국전쟁과 군사정권이라는 시대적 폭력 속에서 개인적 고통과 상처를 경험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적 발언으로 인해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직에서 해임되기도 했으며, 이 사건은 그의 예술 인생에 깊은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윤형근은 더욱 깊은 내면으로 침잠하며, 외적인 설명이 아닌 내면적 고백으로서의 회화를 지향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짙은 청색, 갈색, 검정색을 사용하며, 화면 위에 반복되는 수직 색면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단순한 구조 속에서 그는 오히려 회화의 본질, 즉 '존재의 감각'을 깊이 있게 전달한다. 윤형근에게 회화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동양철학과 기독교적 사유가 결합된 존재론적 인식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말한다. “나는 나를 억누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말하지 않고 싶다.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고 싶다.” 이는 그의 작품이 왜 침묵을 택하면서도 강한 울림을 주는지를 설명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의 회화는 결코 설명되지 않지만, 설명을 넘어선 감정의 차원에서 관람자와 조우한다.
색면의 수직성, 감정의 응축 — 윤형근 회화의 구조
윤형근의 대표작들을 보면, 반복되는 수직의 색면이 화면을 나누듯 흐른다. 그는 붓 대신 붓자국이 드러나는 평붓을 사용하여 물감을 먹이듯 번지게 하고, 화면 위에 겹겹이 색을 쌓아올린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흐림과 번짐은 고의적이지 않지만, 철저히 작가의 의식 하에 이루어진다. 이러한 색면은 단순한 면 분할이 아니라, 삶의 단면이며 존재의 흔적이다. 색은 그 자체로 감정이자 경험이며, 시간의 흐름이다. 특히 그의 청색과 갈색은 한국 전통의 흙, 먹, 물, 하늘, 대지 등의 자연 색에서 유래하였고, 윤형근은 이를 통해 자연과 인간,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이라는 이원적 세계를 시각화하였다. 《Burnt Umber & Ultramarine》 연작은 그의 조형언어가 가장 집약된 시기로 평가된다. 이 시리즈에서 그는 청색(울트라마린)과 갈색(번트엄버)을 반복적으로 병치시키며, 색과 색 사이에 침묵의 공간을 만든다. 이 여백은 단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유의 틈이며 감정의 여운이다. 그 사이에는 해석되지 않은 슬픔, 말해지지 않은 고통, 존재의 흔적이 스며 있다. 그의 작업은 느리고 반복적이다. 한 화면을 완성하는 데에도 수일에서 수주가 걸릴 수 있으며, 그는 한 번의 붓질 이후 물감이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 이 기다림과 절제는 그에게 있어 예술이 곧 수행이라는 믿음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즉, 윤형근에게 회화는 감각의 폭발이 아닌, 고요한 감정의 퇴적이었다. 또한 그의 작품은 작가 자신을 넘어서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과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다. 그는 말하지 않지만, 그 침묵은 폭력에 대한 저항이며, 개인적 상처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의 색면은 곧 벽이며, 문이며, 상처이며, 동시에 회복의 공간이다. 관람자는 이 색면 앞에서 자기 감정의 거울을 마주하게 된다.
침묵의 회화, 윤형근이 남긴 예술적 유산
윤형근의 회화는 눈에 띄는 이미지 없이도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색면추상은 단순하지만 무겁고, 절제되어 있으나 감정으로 충만하다. 그는 말하지 않되 존재를 말하며, 그 말 없음 속에서 삶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 철학, 삶의 태도 전반과 맞닿아 있다. 그는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구별되는 ‘동양적 절제’를 보여주었으며, 색과 구조, 반복과 여백 속에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새겼다. 이는 한국 단색화가 단지 양식의 차원이 아니라 철학적, 정서적 사유의 결과물임을 잘 보여준다. 윤형근은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서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제기한 작가였다. 그의 작업은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고, 베니스 비엔날레, 휘트니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등에서 소개되며 한국미술의 위상을 높였다. 특히 서양 추상미술이 지닌 논리와 이성과는 다른 감성적 추상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서구 비평가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결론적으로 윤형근은 ‘말하지 않는 회화’의 미학을 완성한 작가였다. 그의 색면은 단지 색이 아니라 감정의 기억이며, 그의 여백은 공허가 아닌 사유의 공간이다. 침묵 속에서도 강한 울림을 전하는 그의 작품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존재의 본질과 예술의 역할을 묻는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