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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의 추상화, 자연과 감성의 융합적 조형언어

by overtheone 2025. 6. 19.

유영국은 한국 추상미술의 개척자로, 자연을 단순한 재현이 아닌 감정의 구조로 해석하며 독창적인 추상 세계를 구현한 화가다. 그의 회화는 산과 자연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을 감각과 색채, 구조 속에서 추상화하여 한국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본문에서는 유영국의 자연관과 추상표현의 융합 양상, 조형미학적 의의를 심층적으로 고찰한다.

유영국 관련 사진

자연으로부터, 추상으로 — 유영국의 예술 세계

유영국(1916~2002)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추상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는 20세기 초중반 격동의 역사 속에서 전통 회화와 서양미술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 자연을 사유하고 그것을 추상으로 번역해낸 조형적 실천가였다. 유영국의 예술은 단순히 양식의 전환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근본적 전환이었다. 그의 예술세계는 "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 강원도와 경북 일대의 산천에서 자랐고, 그 경험은 평생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유영국의 ‘산’은 단지 지형적 형상이 아니라, 감정과 감각, 기억과 정신이 중첩된 상징적 구조였다. 그는 산을 반복적으로 그리되, 그것을 점차 선과 면, 색의 배열로 환원해 가며 회화적 추상의 세계로 나아갔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쟁, 산업화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복잡한 시기에 유영국은 내면의 고요함과 조형적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그는 도쿄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서양화의 기법을 접했지만, 유럽식 모더니즘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한국인의 정서와 자연관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언어를 형성했다. 그 결과, 유영국의 추상은 서구의 절대 추상과는 구별되는 ‘감성적 구조체’로 자리 잡는다. 그의 예술은 결국 '자연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형태를 해체하고, 감정을 도형화하며, 색을 통해 산의 기운과 생명을 포착하고자 한 유영국의 작업은 회화 그 자체가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추상은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 그리는 수단이자, 내면의 감정을 시각화하는 언어였다.

자연의 해석, 감정의 구조 — 유영국 추상화의 미학

유영국의 회화는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선과 면, 원색의 반복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섬세한 조형 논리와 감성의 축적이 공존한다. 특히 ‘산’은 그의 평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모티프였고, 그것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선 정신적 상징이었다. 그는 산의 윤곽을 점차 단순화하여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시켰고, 이는 한국적 자연관의 조형적 추상화로 이해된다. 대표작인 《작품》(1960년대 연작)에서는 뚜렷한 삼각형 형상이 반복되며 화면을 지배한다. 이 삼각형은 단순한 산의 윤곽이면서도 동시에 정신적 중심축으로 기능한다. 삼각형을 구성하는 굵은 선과 대비되는 색의 배치, 그리고 색면 간의 긴장감은 시각적 리듬과 정서를 만들어낸다. 그는 물질과 형상을 분리하지 않았고, 모든 요소가 하나의 감정적 구조로 결합되도록 구성했다. 색채의 사용 또한 유영국 회화의 중요한 요소다. 그는 원색 계열의 색을 선호하면서도 과장되지 않게 배치하였고, 화면 전체에 균형과 조화를 부여하였다. 특히 붉은색과 청색의 조합,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는 한국의 전통 채색화에서 느껴지는 시각적 안정감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색채 감각은 유영국이 추상회화를 하면서도 한국화의 정서를 놓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재료와 기법에 있어서도 그는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두꺼운 마티에르나 콜라주적 기법보다는 평면성과 구성의 힘을 중시했고, 회화의 물성보다 내면의 논리를 강조하였다. 그의 회화는 철저히 통제되고 절제된 화면 속에 감정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며, 관람자는 그의 그림을 보며 시각이 아닌 ‘사유의 공간’에 들어서게 된다. 유영국의 추상은 ‘완전한 무형’을 지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현실에 대한 기억과 경험, 특히 자연과의 교감을 기반으로 한 ‘감정의 형태화’를 추구했다. 이는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이 지향한 절대 추상과 차별되는 지점이며, 바로 이 점에서 유영국의 회화는 한국적 추상의 출발점이자 독자적 화법으로 평가받는다.

유영국의 유산, 한국적 추상의 가능성

유영국은 한국 추상회화의 창조적 선구자였다. 그는 자연을 단순히 재현하거나 관조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감정의 구조로 해석하며 화면 위에 조형적으로 풀어냈다. 그의 작업은 자연을 향한 내면적 응시이자, 추상을 통한 철학적 사유였다. 그의 회화는 전통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한국적인 정서와 조형 원리를 품고 있었고, 서구적 미술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동시대 세계미술과의 접점을 확보하였다. 이는 유영국이 예술가로서 얼마나 고유한 시각을 가졌는지를 입증한다. 그는 한국 추상미술을 세계화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며, 후대 작가들에게도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 유영국의 회화는 한국적 미의 현대적 해석이자, 자연과 인간, 감정과 조형 사이의 조화로운 긴장을 보여주는 예술적 전범으로 기능한다. 그의 그림은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체감하는 사유의 조형이며, 자연과 예술, 그리고 존재를 연결하는 다리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유영국은 한국 회화가 나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그의 예술은 ‘산을 그리되 산을 넘은 그림’이며, ‘추상이되 감정을 담은 회화’였다. 그의 작업은 지금도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과 가능성을 말해주는 살아 있는 전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