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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훈의 도석화, 형상 너머의 존재를 그리다

by overtheone 2025. 6. 29.

 

양기훈은 한국 현대 동양화계에서 도석화(道釋畵, 불교와 도교 인물화를 중심으로 한 그림) 분야에 있어 독보적인 작가로, 인물의 외형을 넘어 내면의 정신을 담아내는 작업을 통해 깊은 인문학적 울림을 전달한다. 본문에서는 양기훈 화백의 생애와 도석화 작업의 조형적·사상적 의미, 그리고 그의 예술이 지닌 현대적 가치를 심도 있게 살펴본다.

양기훈 관련 사진

양기훈, 인물화로 철학을 그린 예술가

양기훈(1951~) 화백은 한국 동양화계에서 드물게 도석화를 중심으로 일관된 예술세계를 펼쳐온 작가다. 도석화란 불교나 도교, 또는 고승·신선·지혜로운 인물을 형상화한 그림을 말하며, 단순한 초상화를 넘어 사유와 성찰을 담아낸 정신적 회화로 평가된다. 양기훈은 경북 예천 출신으로, 전통 수묵화를 기반으로 한 탄탄한 기초를 다진 후, 인물화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했다. 그는 단순한 형상의 묘사나 외양적 유사성에 집착하지 않고, 인물의 내면적 기운, 정신, 사상을 화면 위에 옮기는 것을 회화의 핵심 과제로 삼았다. 특히 그의 작품에는 불교의 고승, 노자와 장자 같은 도가적 인물, 혹은 이름 없는 무명철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인물들은 정적이고 고요한 자세로 화면 중심에 배치되며, 눈빛, 손짓, 옷의 주름 등 사소한 묘사를 통해 무언의 철학을 전달한다. 양기훈이 도석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점은 형식보다 '정신의 전달'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데 있다. 그는 화면을 비우고 여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관람자와 인물 사이의 '사이'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감정과 사유가 흐르게 만든다. 이 같은 회화 방식은 조선후기 도석화의 계보를 잇되, 철저히 현대적 사유의 방식으로 정제되어 있다. 또한 양기훈은 회화에서 ‘시선의 고요함’을 강조한다. 관객이 그림 속 인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 인물이 관객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시선의 교차는 그림을 단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장으로 변모시키며, 이는 이우환의 관계항 개념과도 철학적으로 상통한다. 그는 말한다. “나는 얼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시간을 그리고 싶었다.” 이 말처럼 그의 도석화는 하나의 초상이 아니라, 존재의 흔적이자 정서의 기록으로 기능한다. 양기훈의 인물화는 시대의 초상을 그리기보다는 시대를 초월한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는 예술적 장치라 할 수 있다.

도석화의 조형성과 사상, 그리고 현대적 해석

도석화는 한국 전통회화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지만 매우 독특한 장르다. 일반적인 초상화가 인물의 외형적 특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면, 도석화는 그 사람의 사상, 인격, 존재감까지 형상 너머로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양기훈은 이러한 도석화의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현대적 시각과 회화기법으로 이를 재창조하였다. 그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수묵과 담채로 이루어지며, 과감하게 절제된 선묘와 느슨한 붓 터치가 화면 전체를 지배한다. 배경은 거의 없이, 인물은 정면이나 측면으로 홀로 배치되어, 극도로 고요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러한 조형 언어는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제거함으로써 ‘정신의 순수성’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불교의 ‘공(空)’ 사상이나 도교의 ‘무위자연’ 개념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으며, 화면 자체가 하나의 사상적 공간으로 기능한다. 그림 속 인물은 종종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거나, 혹은 스스로 명상에 잠긴 채 자신의 내면에 몰입해 있다. 이때 인물은 단지 역사적 인물로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는 존재로 작동하며, 그 시선은 마치 거울처럼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양기훈의 도석화는 또한 매우 현대적인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과연 인간의 정체성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외면으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가? 존재는 형상을 넘어서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그림 속 인물이 입을 열지 않음에도 강하게 전달된다. 그는 또 다른 방식으로는 ‘묵화’를 통해 사상의 자유를 구현한다. 예컨대, 선사(禪師)의 법문을 시각적으로 구성한 작품이나, 장자의 고사를 담은 그림은 단순한 삽화가 아니라 철학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 이미지로서, 회화가 어떻게 텍스트의 깊이를 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양기훈의 작업은 단색화, 미니멀리즘, 수행적 예술과도 철학적으로 통하며, 전통이라는 껍질 안에 갇히지 않는 확장성을 지닌다. 그는 도석화를 통해 한국적 전통 회화의 사유를 현재형으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조형언어와 철학을 동시에 품은 ‘살아 있는 고전’을 창조한 셈이다.

양기훈의 예술이 오늘에 남긴 물음

양기훈의 도석화는 전통과 현대, 형상과 정신, 회화와 철학의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단지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을 비추고 사유하게 만드는 ‘예술적 거울’이다. 그는 말로 사상을 전하는 대신, 침묵하는 얼굴을 통해 그 어떤 설명보다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것이 바로 양기훈 도석화의 힘이다. 오늘날 정보와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그의 그림은 오히려 ‘덜 말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는’ 방식으로 우리와 소통한다. 그의 작업은 또한 한국화가 나아가야 할 길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한다. 전통은 재료나 형식이 아니라 ‘사유의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점, 그림이 단지 시각적 완성에 머물지 않고 철학적 깊이를 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예술은 질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양기훈의 도석화는 지금도 조용히 우리를 바라본다. 그 침묵은 언어보다 강하고, 그 여백은 설명보다 깊다. 우리는 그 앞에서 질문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예술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그 질문이야말로, 예술이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다. 양기훈은 단지 사람을 그린 화가가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사유와 본질, 시간과 정신을 그린 철학자였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묵묵히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