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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형의 색채와 여성의 시선, 헬렌 프랑켄탈러와 색면추상

by overtheone 2025. 5. 7.

헬렌 프랑켄탈러는 여성 화가로서 20세기 미국 미술사에 독자적인 색채 언어를 새긴 인물이다. 그녀는 얼룩지고 흘러내리는 비정형의 색을 통해 색면추상 회화의 가능성을 확장했고, 추상표현주의 이후의 새로운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본문에서는 그녀의 예술 철학, 회화 기법, 그리고 여성의 시각으로 재해석된 미술사의 전개를 중심으로 프랑켄탈러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헬렌 프랑켄탈러 관련 사진

유동하는 색의 시학, 헬렌 프랑켄탈러와 회화의 탈구조화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 1928~2011)는 20세기 중반 미국 현대미술의 판도를 바꾼 화가 중 한 명으로,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의 감성과 색면추상(Color Field Painting)의 조형 언어를 연결한 매개자였다. 그녀는 물감이 천 위를 흘러가고 번져가는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독특한 기법을 통해, 회화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확장시켰다. 프랑켄탈러의 예술은 단순한 화면 구성의 실험이 아닌,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미적 사건으로 전환시킨 미술사적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강렬한 감정의 폭발 대신, 색의 침투와 흐름이라는 정적인 움직임으로 회화의 언어를 다시 써내려갔다. 1952년, 프랑켄탈러는 자신의 대표작 <산타페에서의 산(The Mountains and Sea)>를 통해 예술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이전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주로 사용하던 두터운 유화 대신, 묽게 희석한 아크릴 물감을 비정형 캔버스에 직접 부었다. 이로 인해 화면은 붓질의 흔적보다 얼룩과 색의 스며듦으로 채워졌고, 전통적인 구성의 틀에서 벗어난 유기적이고 직관적인 회화가 탄생했다. 이는 훗날 ‘스테인 페인팅(stain painting)’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후속 작가들인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 케네스 놀랜드(Kenneth Noland) 등의 색면추상 화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프랑켄탈러의 회화는 형상의 재현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정서의 흐름과 풍경적 영감이 녹아 있다. 그녀는 종종 자연에서 받은 감흥을 추상적인 색과 형태로 전환하며, 감정의 구조를 유기적으로 형상화했다. 그녀의 작품은 보기에는 평온하지만, 그 속에는 순간의 감각, 사유의 잔상, 감정의 파편이 얽혀 있는 감각적 층위가 존재한다. 특히 여성 예술가로서 그녀가 구현해낸 회화는,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감정과 물성, 신체성과 직관을 결합한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프랑켄탈러는 회화를 ‘완성된 구조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열려 있는 감각의 장으로 이해했다. 그녀의 화면에서는 선이나 경계가 분명하지 않고, 색과 색, 공간과 여백 사이가 스며들고 섞인다. 이처럼 그녀는 분리보다는 연결, 고정보다는 흐름을 중시하는 태도로 작품을 구성했다. 이는 회화가 단지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흐름을 담아내는 언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프랑켄탈러의 예술은 ‘그림’이 아니라, ‘경험’에 가까운 시각적 사건이며, 감상자와 캔버스 사이에 형성되는 감정의 교류를 핵심으로 한다. 당시 미국 미술계에서 프랑켄탈러의 등장은 파격이었다. 남성 중심의 추상표현주의가 여전히 지배적인 분위기였으며, ‘행위의 흔적’과 ‘무의식의 드러남’이라는 수사학이 회화의 주된 미학으로 자리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프랑켄탈러는 물성의 조절과 색의 침투라는 방식으로 다른 차원의 표현 언어를 구축했고, 이는 즉각적인 충동보다는 지속적인 스며듦이라는 미학적 태도를 통해 구현되었다. 그녀의 작업은 즉흥성과 숙고, 감성과 이성, 직관과 기술이 조화를 이루는 보기 드문 회화 실천이었으며, 이는 현대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단초가 되었다. 프랑켄탈러는 예술이란 결국 감각의 확장이며, 회화는 그 감각을 담는 가장 넓은 그릇이라고 믿었다. 그녀의 붓은 특정한 형상을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정과 시간, 기억과 자연의 흐름을 응축하는 매개였다. 그녀는 색을 통해 침묵했고, 여백을 통해 이야기했으며, 표면이 아닌 깊이에서 회화를 작동시켰다. 그 결과 그녀의 작품은 감상자가 마주하는 순간마다 새롭게 해석되며, 그 자체로 하나의 열린 텍스트로 기능하게 되었다. 결국 헬렌 프랑켄탈러는 단순히 ‘여성 화가’로만 기억될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추상미술의 진화를 이끈 사유의 실천가이며, 색과 감정, 여백과 침묵을 통해 회화의 미래를 확장시킨 선구자였다. 그녀의 화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보는 것’ 이상의 ‘느끼는 예술’로서, 감각과 이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학의 표본으로 남아 있다.

 

색의 침투, 프랑켄탈러 회화의 물성과 감성

헬렌 프랑켄탈러의 회화 세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바로 ‘스테인 페인팅(Stain Painting)’이라는 독자적인 기법이다. 이는 희석된 물감을 마른 캔버스에 직접 붓거나 흘려보냄으로써, 전통적인 붓질의 자취나 층위적 색의 구조 없이도 회화 전체를 감정의 공간으로 채우는 방식이다. 그녀는 물감이 천에 스며드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받아들이며, 의도적 제어와 무작위성 사이의 미묘한 경계 위에서 회화를 구축했다. 이러한 방식은 표면의 구축이 아닌 침투를 중심으로 하며, 단순히 보는 회화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회화를 가능하게 한다. 프랑켄탈러는 종종 “나는 색으로 생각하고, 색으로 말하며, 색으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고백은 그녀의 회화가 단지 시각적 구성 요소를 다루는 작업이 아니라, 감정과 감각, 직관의 물리적 전환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녀에게 색은 사물의 속성이 아닌 ‘존재의 방식’이었다. 그녀는 하나의 색이 다른 색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물감의 농도가 천 위에서 어떻게 번지고 멈추는지를 관찰했고, 이 모든 과정에서 화면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기를 바랐다. 이런 점에서 프랑켄탈러의 회화는 마치 살아 있는 풍경 같기도 하며, 특정한 내면의 지형처럼 다가온다. 대표작 <산과 바다(Mountains and Sea, 1952)>는 그녀의 색면 회화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이 작품은 풍경을 직접 묘사하지 않지만, 색의 흐름과 여백의 리듬, 푸른 물감의 번짐 속에 바다의 공간감과 산의 울림이 녹아 있다. 회화는 여기서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감각의 공명을 담아내는 수단이 된다. 프랑켄탈러는 이 작품을 통해 ‘풍경’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도, 그 정서를 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해 보였다. 그녀는 1960년대 이후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게 되면서 색의 번짐과 흡수력에 대한 실험을 더욱 본격화했다. 유화보다 빠르게 마르고, 투명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아크릴은 프랑켄탈러에게 새로운 회화적 지형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색이 겹쳐질 때의 중첩과 투명성, 빛의 반사와 흡수 등을 고려하여 화면을 구성했고, 이로 인해 그녀의 작품은 더욱 심화된 공간성과 리듬감을 갖추게 된다. 그녀의 회화는 정지된 이미지가 아닌 시간의 흔적이자 흐름의 궤적이며, 감정의 박동을 색으로 기록하는 일종의 ‘색채 연대기’다. 프랑켄탈러의 회화가 지닌 또 다른 힘은, 남성 중심의 추상표현주의를 비껴간 ‘여성적 직관’의 언어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그녀는 과도한 상징과 설명을 거부하고, 추상 속에 내재된 감각과 정서를 가시화함으로써, 남성 중심 회화에서 주로 강조되던 힘과 충동이 아닌, ‘스며듦과 교류’의 미학을 실현했다. 이는 이후 페미니즘 미술 담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몸으로부터의 언어’, ‘내면 감각의 회화화’와도 일맥상통하며, 프랑켄탈러는 그 미학적 기원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결국 그녀는 회화를 통해 자기만의 사유 방식을 표현했다. 논리보다는 리듬, 구도보다는 감각, 상징보다는 체험이 강조되는 그녀의 작업은, 현대 회화가 어떻게 시각을 넘어서 촉각, 정서, 기억까지 포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그녀는 회화를 통해 존재와 색, 공간과 시간 사이의 관계를 매번 새롭게 구성했고, 이는 동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녀의 영향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감각의 흔적을 남긴 손, 헬렌 프랑켄탈러의 유산

헬렌 프랑켄탈러는 미국 현대미술에서 단지 색면추상의 전개를 이끈 화가로만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회화의 경계를 허문 혁신가이자, 색을 감정의 언어로 변환한 시인이고, 여성의 시선으로 추상미술을 다시 정의한 실천가였다.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회화를 하나의 닫힌 구조가 아닌 ‘열린 감각의 장’으로 보는 태도이며, 그 안에서 색은 기호가 아니라 정서의 몸짓으로 살아 숨 쉰다. 프랑켄탈러의 작품은 지금도 여전히 ‘감상’이라기보다 ‘경험’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색의 흐름을 느끼고, 공간의 여백에 공명하며, 시간의 결을 손끝으로 더듬는 과정이다. 그녀는 “내 그림은 나의 감정이 흘러 들어간 천”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회화가 얼마나 정직하게 감정을 담을 수 있는지, 그 정직함이 얼마나 조용하면서도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고백이었다. 그녀의 작업은 지금도 다양한 장르와 세대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설치미술, 환경미술, 감성 기반 인터페이스 디자인 등 여러 현대 시각 언어들이 그녀의 접근 방식을 참조하고 있으며, 특히 물성과 감성의 접점에서 예술을 탐색하는 흐름은 그녀의 작업에서 강한 원형을 찾을 수 있다. 프랑켄탈러는 기술이 아닌 감각, 해석이 아닌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에게도 유의미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결국 헬렌 프랑켄탈러는 ‘감정이 색이 되는 순간’을 가장 순수하게 포착한 화가였다. 그녀는 물감을 흘리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 흘러내림은 결코 무질서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 인간의 감정과 사유, 자연과의 대화, 시간과의 조응이 고요하게 응축된 결과였다. 그녀는 눈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흘려보냈으며, 그 흔적이 오늘날까지도 보는 이의 감각을 깨운다. 그녀의 화면을 바라보면, 마치 바람이 스쳐간 자국처럼, 빛이 잠시 머물다 간 자리처럼 느껴진다. 그 안에는 설명되지 않은 감정이 있고, 정의되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으며, 무엇보다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침묵이 존재한다. 바로 그 점에서, 헬렌 프랑켄탈러는 색으로 말한 가장 조용한 혁명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