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동서양의 경계를 지운 화가, 자오 우키의 예술과 철학

by overtheone 2025. 7. 6.

 

자오 우키(Zao Wou-Ki)는 중국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화가로, 동양의 정신성과 서양의 형식미를 독창적으로 융합시킨 대표적인 현대 예술가이다. 그는 서예적 감성과 추상 표현주의적 기법을 통해 문화와 정체성,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시각화하였다. 본 글에서는 자오 우키의 생애, 작품 특징, 그리고 미술사적 위치를 중심으로 그의 예술세계를 깊이 탐색한다.

자오 우키 관련 사진

문명의 교차로에서 그림을 그린 남자, 자오 우키

자오 우키(趙無極, Zao Wou-Ki)는 1920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이름 자체가 말해주듯 ‘끝없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의 예술 세계는 경계가 없고, 한 장르나 문명의 틀에 가두기 힘든 자유로운 영역이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문자와 추상,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들이 자오 우키의 작품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하며, 독창적인 시각 언어를 구축해냈다. 그의 회화 인생은 항저우 국립예술학교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전통적인 동양 회화와 서예, 그리고 서구 미술의 기초를 동시에 익혔고, 이 시기부터 이미 동서양을 넘나드는 시각적 감각을 발전시켜갔다. 1948년, 중국 내 정치적 혼란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한 자오 우키는 파리에서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당시 유럽 미술계를 주도하던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재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단순한 서구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의 회화 형식에 동양적인 정신성과 철학, 즉 ‘기운생동(氣韻生動)’과 같은 개념을 불어넣으며, 서구 회화가 가지지 못한 ‘내면적 시간의 흐름’을 도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는 유화임에도 마치 수묵화처럼 흐르고 번지는 붓터치로, 그 안에 ‘호흡’과 ‘여백’이라는 동양적 감각을 담았다. 이러한 표현은 단순히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시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오 우키는 서구 미술계에서도 ‘동양의 시적 추상’이라 불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파리 퐁피두센터, 베이징 국립미술관 등 세계 유수 기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생전과 사후를 막론하고 지속적인 전시와 학술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서구 미술 언어 속에 동양적 사유를 담은 최초의 인물 중 하나로서, 예술사를 횡단한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였다.

 

자오 우키의 화면 속 흐름과 정적의 조화

자오 우키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관람자는 일차적으로 강렬한 에너지와 흐름을 체험하게 된다. 그의 초기 작품은 세잔과 마티스, 그리고 파울 클레의 영향을 받은 구성적이고 기호적인 회화였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는 문자와 형태를 해체한 추상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동양의 서예에서 따온 붓질은 그의 대표적 표현기법이 되었고, 이로 인해 유럽 미술계에서는 그를 ‘붓을 든 철학자’로 불렀다. 그의 회화는 ‘공간의 깊이’보다는 ‘시간의 흐름’을 중시한다. 캔버스 위에 펼쳐지는 선과 색의 조화는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기운과 감각의 흐름을 반영한다. 이는 동양의 수묵화 전통, 특히 장대하고 추상적인 중국 산수화에서 영향을 받은 요소이다. 하지만 자오 우키의 작품은 고전적 산수화의 구체성을 탈피하고, 철저히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자연의 해석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29.09.64>는 날짜를 제목으로 삼은 작품으로, 구체적 대상 없이 폭발적인 색의 층위와 붓질의 에너지로 화면을 채운다. 이 작품은 명백한 서구식 유화 기법으로 완성되었지만, 그 안에는 산과 물, 바람과 같은 자연적 기운이 상징적으로 스며 있다. 실제로 자오 우키는 "나는 풍경을 그리지 않지만, 풍경처럼 느껴지게 만든다"고 말한 바 있으며, 이는 그의 예술이 추구하는 핵심 정서를 함축한다. 또한 그는 색채를 통해 감정의 미묘한 결을 그려냈다. 차분한 회색, 푸른 남색, 흩날리는 백색은 동양화에서 자주 쓰이는 톤이지만, 그의 회화에서는 유화 물감 특유의 질감과 혼합되어 전혀 다른 시각 경험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자오 우키의 작업은 문화와 매체, 표현 방식의 복합적인 융합체이며, 그것은 단순히 기술적 차원을 넘어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통합을 구현한 것이다.

 

경계를 넘어 흐른 예술, 자오 우키의 유산

자오 우키의 예술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융합’을 실현한 독보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그의 작업은 특정 문화의 소속을 초월하여, 인간의 감각과 감정, 사유의 깊이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한쪽 세계에 편중되지 않고, 오히려 둘 사이의 대화를 유도하며, ‘경계 없음’이라는 가치를 실천한 작가였다. 오늘날, 문화의 융합과 정체성의 재구성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에 자오 우키의 작품은 그 어느 때보다 시의적절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회화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과 정신의 흐름을 전하며,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던 시각 언어에 의문을 던진다. 미술은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 형식을 구성하는 세계관의 문제임을 그의 작업은 강하게 말하고 있다. 자오 우키는 2013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화폭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그는 단지 ‘중국인 예술가’가 아닌, ‘세계의 예술가’로서 동서양 예술의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냈고, 그의 유산은 앞으로도 동시대 예술가들과 학문에 깊은 영감을 줄 것이다. 동양의 철학을 서양의 언어로 번역해낸 그의 예술은, 시각의 경계를 넘어선 하나의 사유 공간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