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관은 한국 현대미술 초기에 독자적인 반추상 화풍을 개척한 실험적 예술가였다. 그는 한국적 소재와 조형언어를 서구적 표현 양식과 융합하며, 한국 회화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본문에서는 남관의 반추상 미술이 지닌 조형적 특징과 한국미술사에서의 위치를 심층적으로 고찰한다.
불모지에서 피어난 조형 실험, 남관의 등단
남관(1911~1990)은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과 전개 과정에서 중심축을 담당한 인물이다. 그는 전통 한국화와 서양화의 경계에서 조형 언어의 실험을 지속하며, 특히 반추상이라는 독자적 화풍을 구축한 예술가로 평가된다. 남관의 예술은 단순한 회화 양식의 확장을 넘어서, 동양적 정신성과 서구적 조형미학의 충돌과 융합이 이룬 조형의 지층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기,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에서 수학하면서 동서양 미술의 본질을 직접 체득하였다. 해방 후 귀국한 남관은 당시 한국 미술계가 전통과 서구화 사이에서 방향성을 모색하던 시기에 ‘순수 조형 언어’로서의 미술을 주장하며, 기하학적 형태와 상징, 그리고 감정의 추상화를 통해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 나갔다. 남관의 화풍은 시기마다 다양한 변화를 보이지만, 일관된 특징은 ‘재현을 넘어선 본질의 탐색’이었다. 그의 회화는 구체적인 형상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완전한 추상으로 가지 않는, 이른바 ‘반추상’의 형태를 띠며, 회화가 감각과 상징, 철학을 동시에 담을 수 있는 장르임을 입증하였다. 그가 화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전쟁 이후 재건기 화단 속에서 순수미술의 방향성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당시 대부분의 작가들이 유화 기법을 통해 서구 추상 표현주의를 따르거나, 전통을 복원하는 데 집중했던 것과 달리, 남관은 두 영역 모두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회화 언어를 만들어냈다. 이 같은 작업은 단지 개성의 차원이 아닌, 시대와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남관 반추상의 조형 언어와 회화적 사유
남관의 반추상 작품은 구조적으로 명확한 구획과 대담한 색면, 그리고 상징적 이미지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그는 단순한 추상이 아닌 ‘부분적 재현’을 통해 관람자의 상상력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회화적 공간을 구성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달리는 사람》, 《생명의 기호》, 《지평》 등이 있으며, 이들 작품에서 나타나는 형상은 명확하지 않지만 내포하는 감정과 철학은 강렬하다. 《달리는 사람》 연작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단순화하면서도 운동감을 부여하고, 검은 실루엣과 붉은 배경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존재의 역동성과 고뇌를 시각화하였다. 이 인물들은 구체적이지 않지만 보편적이며, 한국전쟁 이후의 상처와 생존의 욕망을 상징한다. 남관은 ‘형상 없는 형상’을 통해 인간 실존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생명의 기호》 시리즈는 원형, 삼각형, 십자 등의 기하학적 도형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이는 인간, 우주, 영혼 등 추상적 개념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기호는 고대 문자나 토템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동양의 상징 문화와도 연계된다. 남관은 이러한 기호를 화면 위에 반복·변형·충돌시키며 ‘보이지 않는 질서’를 회화화하였다. 색채 역시 남관 회화의 중요한 요소다. 그는 붉은색, 검정, 청색, 황색 등 원색 계열을 선호하였으며, 이들 색은 단순한 시각적 자극을 넘어서 상징적 감정을 유도한다. 특히 붉은색은 그의 작품에서 생명, 열정, 고통, 인간의 본능 등을 나타내는 주요 색상으로 자주 등장하며, 전체 화면에 감정의 흐름을 조성한다. 또한 남관은 재료의 물성을 중요시하였다. 두꺼운 질감, 겹겹이 올린 물감층, 때로는 모래나 금속을 혼합한 재료 실험 등은 그의 회화에 독특한 물질감을 부여했다. 이는 시각적 감상뿐 아니라 촉각적 감각, 심리적 반응까지 아우르는 회화적 체험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그의 회화는 단순히 ‘보는 그림’이 아니라 ‘느끼는 장(場)’이다. 남관의 회화는 결국 ‘기억과 무의식의 재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을 고수하지 않으면서도 전통을 파괴하지 않았고, 서구화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이를 배제하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이 서구화와 전통의 이분법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몸소 증명한 작가였다.
남관 예술의 의의와 한국미술의 경계 넘기
남관은 한국미술이 전통과 서구화의 갈림길에서 진정한 창조는 어느 한쪽의 선택이 아닌 ‘자기 언어의 발명’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 예술가였다. 그는 반추상을 통해 재현과 추상, 전통과 현대, 감성과 이성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원초적 질문을 던졌다. 그의 회화는 관람자에게 해석을 강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열려 있는 상징과 형상을 통해 각자의 감정과 경험을 투영하게 만든다. 이는 회화가 단지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통로가 아니라, 관람자와의 공동 창조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개방성과 상호작용성은 오늘날 현대미술의 핵심 개념과도 연결된다. 또한 그는 단순한 형식 실험가가 아니었다. 그의 그림 속에는 한국 현대사의 흔적, 민중의 감정, 개인의 실존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했고, 붓질로 사유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관의 회화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동시대 작가들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남관은 반추상이라는 독자적 조형 언어를 통해 한국 회화의 경계를 넓힌 선구자였다. 그는 재현과 추상 사이의 틈을 열고, 그 틈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을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표현해냈다. 그의 예술은 지금도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예술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은 누구의 언어인가’.